GMC HUMMER EV
군용차 험비에서 태어난 허머는 경제 위기의 파고에 휩쓸려 2010년 문을 닫아야 했다. 10년 만에 EV로 부활한 허머는 GMC 서브 브랜드로 재건되었다. 첫 작품인 에디션1은 3모터로 1,000마력의 괴력을 내며, 오프로드 특화 기술과 스마트 크루즈 등 각종 첨단 장비로 무장하고 있다.
허머가 부활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GM이 위기에 몰리면서 2010년 사망 선고가 내려졌던 허머는 10년 후인 2020년 1월, 르브론 제임스가 등장하는 수퍼볼 광고를 통해 부활을 공식화했다. 실물 허머가 공개된 것은 지난 10월. 다만 이전과 같은 독립 브랜드는 아니고 트럭 전문 GMC의 엠블럼을 달고 있었다.
GM은 쉐보레 타호와 캐딜락 에스컬레이드에 하이브리드 버전을 출시하며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양산형 전기차 분야에서도 많은 기술적 노하우를 다져왔다. 오히려 문제라면 미국 트럭 시장의 뿌리 깊은 보수성. 실제로도 2007년 시장에 나왔던 타호와 에스컬레이드 하이브리드는 후속작 없이 단종되었다. 그래도 기괴한 테슬라 사이버 트럭이 예상치 못한 화제를 불러 모으는 등 시장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리스크는 피하면서 시장의 반응을 살펴보기에 허머 부활은 최적의 카드였을 것이다.
GMC의 서브 브랜드로 부활하다
이번에 공개된 신차 디자인을 보면 GMC 로고를 구석에 조그맣게 넣고 허머를 중앙에 부각시켰다. 진입각을 고려한 범퍼 아래 각도나 두터운 언더 프로텍터는 이 차가 전문 오프로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유의 헤드램프와 그릴 디자인은 크게 변형되었지만 허머 DNA는 진하게 느껴진다. EV 시대에 필요 없어진 프론트 그릴이 사라진 대신 HUMMER 로고를 새겼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수직 그릴 느낌이 나도록 디자인했다. 각 램프 사이의 경계선은 기존 수직 그릴 개수와 같은 7개. 차체 크기는 길이 5507mm, 높이 2060mm, 휠베이스 3444mm로 H1과 거의 비슷한 덩치다. 트럭형 외에 SUV 보디가 추가된다. 트럭 보디는 흔히 말하는 더블캡 스타일로 뒷좌석이 넓은 대신 트럭 배드가 짧은 형태.
EV라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GMC 트럭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북미 트럭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브랜드답게 다양한 노하우가 녹아 있다. 멀티프로 테일 게이트가 그중 하나. 이름처럼 다양한 기능이 숨어 있는데, 예를 들어 게이트를 연 후 중간 부분을 접어 내리면 밟고 오르내리기 딱 좋은 발판이 된다.
탈착식 글라스 루프도 눈에 띈다. 롤바 형식의 B필러 부분을 제외하고 앞뒤 따로 분리되며, GMC에서는 인피니티 루프라고 부른다. 덕분에 거의 오픈카처럼 변신한다. 떼어낸 루프는 앞쪽 트렁크에 넣으면 된다. 거대한 엔진이 사라진 노즈 안쪽에는 넓은 수납공간(프렁크)이 마련되었다.
직선을 강조한 인테리어는 허머의 뿌리인 H1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공간 활용성이나 첨단 기능, 고급스러움에서 큰 진보를 이루었다. 12.3인치 풀 디지털 계기판과 13.4인치 터치식 와이드 센터 모니터만으로도 이전 세대 허머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상이다. 큼직한 센터 터널에는 항공기 스로틀 레버 느낌의 시프트 레버와 주행 모드를 바꾸는 회전식 노브를 배치했다. 시트와 도어 트림은 깔끔하고 고급스럽다. 뒷좌석 등받이 안쪽에 작은 수납공간을 마련했다.
군용차 이미지와 EV의 궁합은?
군용차 이미지와 EV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현대의 전쟁무기는 전기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수많은 전자 장비를 가동하기 위해 많은 전기를 필요로 한다. 또한 엔진을 모터로 바꾸면 강력한 토크와 함께 정숙성까지 보장하기 때문에 군용차를 하이브리드 혹은 EV화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대용량 배터리를 채우는 데는 고전압을 이용한 급속충전이 효과적이다. 허머 EV는 포르쉐처럼 800V를 사용한다. 충전 스펙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10분 충전으로 160km 주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가정용 전원을 사용할 경우(스테이지2, 240V)에도 30분 만에 20% 용량을 채울 수 있다. 충전할 때는 헤드램프 부분이 충전 게이지처럼 변해 외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허머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능력치
전기차로 환골탈태하긴 했어도 이름에 어울리는 오프로드 성능을 마련했다. 4륜 독립 서스펜션은 에어 댐퍼로 높낮이를 조절한다. 오프로드 모드에서 지상고를 기본보다 5cm 높일 수 있고, 저속 전용의 익스트랙트 모드에서는 15cm까지 높일 수 있다. 에디션1에 기본 제공되는 35인치 타이어(굿이어 랭글러 테리토리)를 조합하면 81cm 도하가 가능하다. 익스트랙트 모드를 선택하면 진입각 49.7°, 탈출각은 38.4°(기본 41.4°, 31.6°)까지 늘어난다.
좁은 길이나 장애물에서 최대 10° 조향이 가능한 뒷바퀴를 활용하면 사선으로 비스듬히 전후진이 된다. GM에서는 게걸음(crab walk)이라는 귀여운 명칭을 붙였다. 얼마 안 꺾이는 것 같아도 일반적인 4WS 뒷바퀴가 3~4° 수준이다. 반대 방향으로 꺾으면 회전반경을 줄인다.
최대 18개의 카메라가 달려 차체 주변을 꼼꼼히 모니터에 비추고, 언더보디에도 광각 카메라를 달았다. 바닥과 접하는 언더보디 카메라는 워셔가 달려 어떤 상황에서도 시야를 확보한다. 거친 사용 조건을 고려해 렌즈 프로텍터는 교환식으로 설계했다. 바닥은 풀 언더보디 아머를 둘러 공기저항을 줄일 뿐 아니라 험로에서 배터리와 구동계를 보호한다.
온로드 주행에서는 지상고를 낮춰 공기저항을 줄이고, GM의 수퍼크루즈 등 첨단 운전보조 시스템도 마련했다. 캐딜락 CT6에서 처음 선보였던 수퍼크루즈는 반자율 운전이 포함된 크루즈 컨트롤 기능. 버튼 하나 누르면 차 스스로 차선을 바꾸고, 앞지르기를 할 수 있다.
허머의 부활은 트럭 시장에 파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판매에 나선 에디션1은 11만2,595달러(1억2,200만원)의 가격에도 불구하고 10분 만에 완판되었다. 몇 대인지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수천 명의 대기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생산은 올 하반기. 장비를 약간 줄이고 출력을 낮춘 EV3X는 2022년, 2모터 버전은 2023년에 나온다. 기본형을 원한다면 최소한 3년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시장의 열렬한 반응이 있다면 생산 시설을 확충할 가능성은 있다. GM은 지난해 말 향후 5년간 30대의 새로운 EV를 공개하고 270억 달러를 전기차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허머 EV는 기대 이상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에 따라 쉐보레와 GMC 등 기존 트럭 라인업의 EV화도 더욱 힘을 받게 될 것이다.
군용차로 태어나
전기차로 부활하다
허머는 80~90년대 미 군용차로 사랑받았던 험비에서 유래되었다. AM제너럴의 험비(HMMWV)는 고기동 다목적차(High Mobility Multipurpose Wheeled Vehicle)의 이니셜로 M151 지프와 M561, M718 등 구식 군용차들을 대체하기 위한 미군의 프로젝트에서 최종 선정되었다. 당시 경쟁자 중에는 미국 MTI사의 의뢰를 받아 람보르기니가 개발한 미드십 모델 치타도 있었다. 람보르기니는 후에 치타를 바탕으로 V12 엔진을 얹어 LM002라는 이름으로 시판하게 된다. 람보르기니 최초의 SUV이자 우루스의 선조다.
험비의 제식명은 M998. 1985년 배치를 시작했다. 험비를 민수용으로 개조한 것이 바로 허머다. 허머의 존재감은 시판 이전부터 남달랐다. 1989년 파나마 침공에서 첫 실전 투입되었고 이어진 걸프전을 통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1992년 나온 민수용 허머 H1은 100km 주행에 24L의 연료를 먹을 정도로 먹성이 좋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디자인과 군용차 바탕의 오프로드 성능은 마초 감성을 자극했다. 생산량은 많지는 않아도 오프로드 전문 브랜드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1999년에 GM에 인수된 후에도 H1은 여전히 AM제너럴 공장에서 만들었졌다(2006년까지 생산). 판매와 마케팅은 GM이 맡았다. 2002년 등장한 허머 H2와 2005년 나온 H3는 수직 그릴과 헤드램프로 모양만 살렸을 뿐 실제로는 GM 양산차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008년 NAIAS에서는 랭글러 크기의 컨셉트카 HX를 공개해 라인업 확장을 예고했다. 하지만 그 해 9월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경제 위기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GM은 살아남기 위해 사브, 새턴, 폰티액, 올즈모빌, 허머 등 산하의 많은 브랜드를 정리해야 했다. 원래는 중국 사천성의 텅중 중공업에 매각하려 했지만 군용차라는 특수성 때문에 미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그대로 문을 닫았다.10년 만에 부활한 허머는 예전과 같은 독립 브랜드가 아니다. GMC 소속의 서브 브랜드에 가깝다. 덕분에 부담을 덜고 모델 라인업 역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최근 이런 식으로 서브 브랜드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메르세데스-마이바흐나 포드 브롱코가 좋은 예다. 차별화를 위해 허머에 달리는 GMC 로고는 전통적인 빨간색이 아니라 검은색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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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열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