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칠레,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케냐, 핀란드, 독일, 일본 등 줄줄이 취소되자 WRC는 챔피언십 최소 요건인 7전을 채우기도 빠듯했다. 급하게 에스토니아 랠리를 받아들이고, 벨기에 이프르 랠리도 영입하기로 했다. 몬자에서 열리는 몬자 랠리 쇼까지 거론되면서 침울했던 분위기도 반전되었다.
타나크의 고향인 에스토니아는 무사히 열려 현대가 소중한 포인트를 챙겼다. 반면 누빌의 고향인 벨기에는 코로나 재확산에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도 이탈리아는 몬자 랠리 강행을 선택했다. 일반 도로를 달리는 여타 랠리들과 달리 관중 통제가 가능한 서킷이라는 공간도 한몫 거들었다.
현대의 챔피언 수성전
이번 경기의 정식 명칭은 ACI 랠리 몬자. 지금까지는 랠리 몬자 쇼로 불렸다. 정식 경기라기보다는 쇼 성격의 이벤트로 시기도 대부분의 모터스포츠 시즌이 끝나는 12월이라 다양한 카테고리의 드라이버들이 모여들었다. 모토 GP 7회 챔피언 발렌티노 로시가 지금까지 7승을 거두었고 르망 24시간 우승자인 딘도 카펠로가 5회로 그 뒤를 따른다. 현대팀의 다니 소르도는 2010년과 2013년 우승 경험이 있다. 타이틀 방어에 사활을 건 현대팀으로서는 마음 든든한 부분.
드라이버즈 포인트에서는 에번스가 2승으로 선두이고 오지에가 뒤를 따르고 있다. 누빌과 타나크는 에번스와 24점, 28점 차이여서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 우승 25점에 파워 스테이지 5점까지 더하면 한 경기에서 최대 30점을 챙길 수 있다. 물론 유력 후보들이 리타이어하거나 성적이 저조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매뉴팩처러즈에서는 현대가 토요타를 7점 차로 리드하고 있다. 개막전 몬테카를로 랠리 우승으로 기세 좋게 시작했다가 스웨덴부터 토요타에게 선두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를 타나크가 잡아 점수차를 줄이고 이탈리아 랠리에서 원투 피니시하며 역전에 성공했다. 현대는 가능성이 희박한 드라이버즈 챔피언보다는 매뉴팩처러즈 타이틀 방어에 모든 것을 걸었다. 누빌과 타나크, 소르도를 엔트리해 배수의 진을 쳤다.
WRC2 클래스에서는 티데만드와 오스트베르크가 드라이버즈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있었다. WRC3에서는 현대 i20 R5를 모는 후투넨이 바르트(슈코다)에게 2점 차 박빙의 리드. 이번 경기에서 타이틀이 결정된다.
눈 내린 웨트 컨디션
몬자 랠리는 이번 시즌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두 번째 WRC다. 본토 개최로 따지면 2003년 이래 오랜만인데, 당시에는 산레모가 무대였다. 1928년 시작되어 역사가 오랜 산레모 랠리는 1973년부터 WRC의 일부가 되었다. 2004년부터 사르데냐로 무대가 바뀌어 버렸지만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몬자는 이탈리아에서 산레모, 사르데냐에 이은 3번째 WRC 개최지. 몬자 서킷은 F1 이탈리아 그랑프리의 무대로 모터스포츠팬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하다.
하지만 이것은 랠리이기 때문에 서킷 레이아웃을 그대로 달리지는 않는다. 오래되어 잘 사용하지 않는 오벌 트랙과 이동로, 주변 도로까지 합치고 다양한 장애물을 활용해 짐카나 스타일의 스테이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서킷 북동쪽 산길 스테이지를 추가해 WRC에 걸맞은 규모로 키웠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개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지만 몬자 랠리에 대한 평가가 좋을 경우 비슷한 시도가 다시 나올 수 있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도로를 통제하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다면 다양한 지역에서 WRC 개최가 가능해질 것이다.
12월 2일 수요일. 셰이크다운 테스트가 몬자 서킷 안에서 시작되었다. 이날은 춥고 눈까지 내려 어려운 경기를 예고했다. 미쉐린에서는 하드와 소프트 컴파운드 외에 웨트 타이어와 스노 타이어를 추가했다. 노면 상황이 다채롭고 선택지가 많아지면 타이어 전략에 따른 변수도 커질 수밖에 없다. 세션이 시작할 때 기온은 영하 1℃. 군데군데 눈이 쌓였고 노면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드라이버들은 다채로운 노면의 감각을 익히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누빌 리타이어로 현대에 찾아온 위기
12월 3일 목요일. 오전 셰이크다운 테스트에 이어 오후 2시 넘어 4.33km의 단거리 SS1에서 최종전 몬자 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는 타막 세팅이지만 군데군데 미끄러운 부분이 있어 난이도가 높았다. 오지에가 톱타임으로 종합 선두에 오르고 누빌과 타나크, 에번스, 로반페라 순이었다. 소르도는 7위.
금요일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SS2~SS6의 5개 스테이지를 달렸다. 서킷 내 13.43km(SS2, SS3)와 16.22km 스테이지(SS4, SS5)를 두 번씩 달린 후 10.31km의 SS6을 추가로 달리는 69.61km 구성. 비에 젖은 아스팔트는 무척 미끄러웠고 군데군데 물웅덩이까지 만들어졌다. 원래 눈길을 대비한 스노 타이어였지만 빗길에서 의외의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오프닝 스테이지 SS2부터 현대팀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물웅덩이를 지나던 누빌이 엔진이 꺼졌는데, 다시 움직일 수 없었다. 실낱같던 챔피언 가능성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누빌은 “희망했던 대로 첫날을 마치지 못했다. 오전에 실수한 후에 순위를 만회하려 강하게 밀어붙였다. SS4 시케인에서 콘크리트 블록에 너무 붙어 서스펜션이 손상되었다. 그래도 아직 주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웅덩이에서 물이 엔진에 들어가 다시 시동이 걸리지 않아 리타이어할 수밖에 없었다. 팀을 위해 뭔가 할 수 없어 실망스럽다.”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드라이버 타이틀 경쟁을 포기한 누빌은 토요일에 차를 아껴 마지막 날 방어전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반면 소르도는 SS2와 SS6을 잡아 선두로 부상했다. 그런데 현대팀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라피가 SS6에서 제동 실패로 시케인을 가로질렀고, 소르도가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원 코스대로 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패널티 판정이 나왔다. 그 결과 선두 소르도부터 5위 타나크까지 10초 차이로 좁혀졌다.
12월 5일 토요일은 서킷을 잠시 떠나 산길로 무대를 옮겼다. 눈과 얼음이 깔려 엄청나게 미끄러워진 산길은 마치 개막전 몬테카를로를 보는 듯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시야도 좋지 않았다. SS7~SS13의 7개 스테이지 126.95km 구간에서 결전을 준비했다.
오프닝 스테이지에서 오지에가 톱타임으로 선두에 올랐다. 이어진 SS8에서는 소르도가 톱타임으로 오지에를 밀어내고 선두로 부상. SS8에서는 종합 3위로 올라선 에번스가 SS9를 잡으며 기세를 올렸다. 토요일의 희생자는 SS10에서 나왔다. 그린스미스가 가드레일과 벽을 연달아 받으며 전복되었고, 현대 C2팀의 베이비가 같은 위치에서 사고로 길을 막아버렸다. SS10이 취소. 이어진 SS11에서 다시 눈이 내려 챔피언 타이틀의 향방을 뒤흔들었다. 득점 선두로 생애 첫 챔피언 타이틀을 눈앞에 두고 있던 에번스가 오른쪽 코너에서 스핀하며 코스 아웃. 리타이어하며 꿈을 접어야 했다.
컨디션이 시시각각 변해 SS11에서는 WRC3의 스칸돌라(i20 R5)가 오지에를 누르고 톱타임을 기록했다. 이어진 SS12는 사고 위험 때문에 취소.
서비스를 받은 후 서킷으로 복귀해 금요일 SS6과 동일한 10.31km 코스에서 SS13을 치렀다. 토요일을 마치는 시점에서 오지에가 종합 선두에 오르고 17.8초 차이로 소르도가 2위. 3위 타나크는 선두와 22.1초 차 3위다. 오지에의 7번째 드라이버즈 챔피언, 현대의 2연속 매뉴팩처러즈 챔피언 타이틀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은 절대 안심할 수 없다.
현대 챔피언 방어에 성공
12월 6일 일요일 몬자 서킷 SS14~SS16 3개 스테이지 38.31km 구간에서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이날의 결과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오프닝 스테이지 SS14는 SS6, SS13과 동일한 10.31km 코스. 오지에가 톱타임으로 선두 위치를 고수했고, 타나크 3위, 소르도 5위로 타나크가 종합 2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소르도는 누구보다 이 코스에 경험이 많다. SS15를 잡아내며 타나크를 밀어내고 종합 2위 자리에 복귀했다.
운명의 최종 스테이지 SS16. SS15와 동일한 코스를 달리며, 파워 스테이지를 겸해 상위 기록 5명에게 추가 점수(5~1점)를 준다. 잃을 게 없는 카츠타가 톱타임으로 5점을 챙겼고, 오지에가 7위로 무난히 우승을 차지해 개인 통산 7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확정 지었다.
현대는 매뉴팩처러즈 챔피언 방어에 성공했다. 소르도와 타나크의 더블 포디엄에 파워 스테이지에서 추가 득점까지 성공한 현대는 241점으로 토요타를 5점 차로 뿌리쳤다. 지난해에 이은 2년 연속 챔피언. 마지막 순간까지 안심할 수 없었다. 현대팀의 아다모 감독은 감정에 복받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2020년 WRC는 평년의 절반인 7전에 불과했음에도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특히 현대와 토요타는 챔피언 타이틀을 두고 매 경기 불꽃 튀는 접전을 벌였다. 가장 최근 복귀 연도 기준으로 현대(2014년)가 토요타(2017년)보다 조금 빠르지만 랠리 경력으로는 토요타 쪽이 월등하다.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워크스팀을 운용했을 뿐 아니라 4번의 매뉴팩처러즈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2012년 독일 알제나우에 모터스포츠 전진기지를 설립한 현대는 이런 격차를 빠르게 좁혔고, 지난해에 이어 연속 챔피언에 등극함으로써 스스로 월드 클래스임을 전 세계에 증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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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열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