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커스터머 레이싱 i20 R5
프라이비트팀을 위한 판매용 랠리카
커스토머 레이싱이란 쉽게 말해 판매를 위한 레이싱카다. 자동차 메이커에 소속되어 회사의 막강한 자본과 기술적 백업을 받는 워크스팀이 가장 주목을 받지만, 사실 모터스포츠 세계는 메이커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개인팀, 즉 프라이비트팀이 대다수를 이룬다. 극소수 팀은 경주차를 직접 개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럴 여력이 안 된다. 이런 수요를 위해 고성능차 메이커이라면 경주차 개발이나 기술 지원을 담당하는 커스터머 레이싱 부서를 운영한다. 포르쉐, 페라리, 아우디, 메르세데스-AMG같은 고성능 메이커는 물론 토요타, 르노, 푸조같은 대중차 메이커도 마찬가지다.
현대는 모터스포츠 분야에 오랫동안 무관심했지만 WRC 참전을 계기로 인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 많은 부분을 영국 MSD에게 맡겼던 첫 번째 도전에서 한계를 실감한 후 2003년을 마지막으로 퇴진했던 현대는 9년이라는 긴 공백을 가지며 철저하게 준비했다. 2012년 독일 알제나우에 현대 모터스포츠를 설립하고 조직을 새롭게 꾸렸다. 그리고 i20을 활용해 신형 랠리카를 직접 개발했다.
현대의 WRC 복귀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커스터머 레이싱 부문을 만들어 판매용 레이싱카 개발에도 나선 것이다. 2015년 공개된 i20 R5는 WRC2와 WRC3 그리고 다양한 국가별 랠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차로 i20 WRC에서 얻은 노하우를 투입했다. 아울러 서킷 투어링 레이스를 위한 i30 TCR도 개발해 WTCR에서 월드 챔피언을 차지했다.
많은 나라에서 활약하는 R5 클래스
2012년 FIA에서 도입한 R5 카테고리는 월드 랠리카 바로 아래 위치하는 랠리 클래스다. WRC 톱 클래스인 월드 랠리카는 가장 강력한 RC1 카테고리. R5는 R4와 함께 그 아래인 RC2 카테고리에 해당된다. 주니어 WRC에서 사용하는 앞바퀴굴림 랠리카는 RC4 카테고리의 R2 클래스이고 1L급 소형차를 사용하는 R1(RC5 카테고리) 클래스는 신입 드라이버와 중소 팀을 대상으로 한다. 이 밖에 타막 전용인 R-GT 클래스도 있다.
포뮬러가 카트부터 포뮬러 주니어, F3, F2, F1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것처럼 랠리에도 다양한 등급이 있다. 강력한 팀과 뛰어난 드라이버라면 최정상 클래스에서 월드 챔피언 타이틀에 도전하겠지만 모든 팀과 드라이버에게 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같은 프라이비트팀이라도 규모와 실력이 제각각이고, 아직 실력과 경험을 쌓아야 하는 어린 드라이버나 잠시 자리를 잃은 프로 드라이버 혹은 도전에만 의의를 두는 아마추어 참가자도 있다. 세분화된 클래스가 필요한 이유다.
월드 랠리카 바로 아래 위치하는 R5 클래스는 WRC 입성을 앞둔 예비 드라이버나 시트를 잃은 프로 드라이버의 영역. 또한 내셔널 챔피언십에서는 최고 클래스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이 역할을 앞바퀴 굴림의 수퍼2000 클래스가 담당했지만, 지금의 R5는 월드 랠리카의 간략화 버전에 가깝다. R5가 등장할 당시에는 월드 랠리카와 외형부터 구성까지 상당히 비슷했다. 하지만 2017년 규정이 바뀌면서 월드 랠리카의 출력이 70마력 가량 오르고 에어로파츠 규제가 풀려 구별이 다소 쉬워졌다.
32mm 에어 리스트럭터가 달린 1.6L 터보 엔진은 300마력에 살짝 못 미치는 출력을 내며 5단 시퀸셜 기어박스를 거쳐 네바퀴를 굴린다. 출력이 월드랠리카에 비해 낮고 전자식 디퍼렌셜, 공력 파츠 등 구조가 간소화되었음에도 여전히 강력한 랠리 머신이다. 다만 워크스팀에 비해 인력이나 예산이 빠듯한 프라이비트팀이 사용하는 만큼 메인터넌스 비용이 중요하다. 워크스팀이라면 이기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프라이비트팀은 찻값과 운용성 등 보다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이마저도 규모가 크고 자금이 넉넉한 팀에 한정된 선택지다.
2016년 프랑스에서 데뷔전 치른 i20 R5
현대가 2015년 처음 공개한 i20 R5는 유럽 전역에서 광범위한 테스트를 거친 후 2016년 투르 드 코르스(프랑스 랠리)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 해 9월 첫 번째 생산 분이 이탈리아 고객에게 인도된 후 수많은 프라이비트팀에 팔려 나갔고, 2016년 프랑스 내셔널 랠리 챔피언십 최종전 우승을 시작으로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등 곳곳에서 승전보가 이어졌다.
2020년형은 신형 댐퍼와 스티어링 시스템을 도입했고 새로운 실린더와 라이너를 사용해 최고출력을 290마력, 최대토크를 44.9kg·m로 높였다. 올해 슬로베니아에서 루크 터크가 챔피언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고, 야리 후투넨은 폴란드 챔피언이 되었다. 후투넨은 WRC 최종전 몬자에서 WRC3 챔피언을 확정 지었다.
하위 클래스의 역할 중에는 드라이버 육성이라는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야리 후투넨이 현대 모터스포츠의 드라이버 개발 프로그램(HMDP)의 산물이다. 자동차 메이커의 모터스포츠 조직은 프라이비트팀에 비해 풍부하고도 다양한 경험과 심도 깊은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은 막 성장하는 재능 있는 드라이버에게는 필수적인 자양분과도 같다. 우리가 알만한 스타 드라이버 대부분이 이런 프로그램의 수혜자들. 슈마허가 메르세데스 벤츠의 드라이버 육성 프로그램 출신인 것처럼 말이다. 현대를 통해 길러진 드라이버들이 앞으로 WRC 역사에 길이 남을 거목으로 성장할 지도 모를 일이다.
핀란드 출신의 후투넨은 독일 랠리 챔피언십과 ERC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2017년 9월 프랑스에서 있었던 테스트를 통해 HMDP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현대 i20 R5를 몰고 WRC2와 WRC3 클래스에 도전해 온 후투넨은 올 시즌 WRC3 챔피언으로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냈다.
커스터머 레이싱 주니어 드라이버 프로그램도 있다. 말 그대로 조금 더 젊고, 가능성을 갖춘 새싹들이 대상이다. 올해 초 현대는 피에르루이 루베, 올레크리스티앙 베이비, 니콜라스 그리야진, 칼럼 디바인, 그레오와 뮌스터 등 5명을 선정했다. 이들 중 루베는 WRC 에스토니아와 터키에서 그리고 베이비는 몬자 랠리에서 월드 랠리카인 i20 쿠페 WRC를 몰고 참전할 기회를 얻었다.
랠리2 시대를 위한 대비
커스터머 레이싱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고 일반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실제로는 모터스포츠 저변을 책임지는 중요한 분야다. 프리미어리그가 빛나기 위해 수많은 하위 리그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 다수의 프라이비트팀이 자사 경주차를 구입해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메이커로서는 이미지 개선과 홍보라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고성능 이미지를 원하는 메이커라면 경주차 개발과 서포트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처음에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N 로고와 컬러가 요즘 들어 멋있게 느껴지는 것은 랠리에서의 성공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i20 N 랠리2는 1.6L 터보 엔진과 5단 시퀸셜 기어박스, 4WD라는 구성은 그대로지만 대부분의 부품을 새로 개발했다. 월드 랠리카에서의 개선점을 적용하고 서스펜션 구성과 댐퍼를 바꾸어 핸들링 특성을 개선했다. 타나크 등 워크스 드라이버를 투입해 광범위한 테스트로 만전을 기하고 있다. i20 R5의 성공은 랠리2 시대에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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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열 기자 다른기사보기